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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념정리

깨지다

사람 사이에서 깨졌다는 표현을 쓸 때가 있다. 상사나 높은 사람들에게 호된 꾸중을 듣거나 경쟁에서 실력이 상당한 상대에게 처참히 패배했을 때 써왔다. 

 

그런데 인생을 살다가 보면, 한 번도 깨져보지 않았을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면, 드라마 셜록에 나오는

셜록의 베네딕트 컴버배치 ⓒ BBC

이 사람처럼 "I'm not a psychopath, Anderson. I'm a high-functioning sociopath" 같은 띵언을 날리는

https://youtu.be/F9sUVrVS4co

Sherlock - Study in Pink

부류의 사람들 말이다. 물론 사람에게 무례한 것의 문제는 그냥 사회부적응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사회부적응이더라도 높은 사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드라마에서의 셜록도 그렇다. 깨질 일 없는 사람들.

 

 나는 내가 어느정도 나이 들기까지 그렇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옳고 그름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냥 말을 10퍼센트만 들어봐도 틀린 것들이 있고, 나는 그럴 때 주저 없이 "더 들어볼 것도 없이 틀렸다" 라고 말했던 사람이다. 사회 적응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맞느냐 아니냐의 문제에 더 관심을 가졌다.

 매우 어렸을 때부터 기억이 꽤 뚜렷하고 말을 할 수 있었던 시기 이후의 많은 기억을 갖고 있다. 걸어다니는게 힘들었던 시절도 기억이 나고, 시계를 처음 읽는 법을 배울 때, 한자를 처음 읽는 법을 배울 때 기억이 생생하다. 어느 한 번 못해본 적이 없었다. 공부를 별로 안해도 잘했고, 피아노도 연습 별로 안해도 잘쳤고, 초등학교 1학년때 크레이지아케이드라는 게임을 해도 친구들보다 잘했고 래더게임에 가서도 잘했다. 대한민국에서 공부를 잘하는 사람에게 주는 어느정도의 칭송은 어린 놈이 자만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지금와서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의미없는 재능이다. 임의의 사람 10명을 모아놔도 그 중에 잘하고 못하고를 가리자 하면 당연히 1,2 명은 잘할 수 밖에 없고 이런 정도로 우월감을 갖는 사람은 이제와서 보면 한심하다. 잘하는 것과 매우 잘하는 것의 벽이 얼마나 높은지에 대해 둔감해지기 마련이다. 별로 안해도 잘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굉장한 쾌감을 준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서 팔방미인처럼 보일 수 있고, 남들이 노력하는 시간에 쉴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행운이다. 

 다행히도, 재능이 애매하면 애매할 수록 이 행운은 빨리 떠나가기 마련이다. 깨진다. 경쟁사회에서 자연스럽게도 자신이 잘하게 된다면 더 잘하는 사람들과 만날 확률이 높다. 하지만 더 이상 그곳에서 자신이 특별하지 않다고 여기는 순간 어린 마음에 상처도 받고, 오만한 생각이 꺾일 수도 있고 본인의 방향성을 새로 설정할 수도 있다. 오만하게 살아오던 한 사람이 단지 남을 이기는 쾌감으로 살아오던 인생을 더 중요한 목표를 위해서 바꿔나갈 수 있다. 잘 깨져서 본인이 하던 분야에 더욱 열정을 기울여야겠다고 결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훌륭하다.

 하지만, 문제는 늦게 깨지는 사람이다. 뭘 해도 남들보다 잘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 쾌감을 누리는 시기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깨졌을 때 낙차가 크다. 언제까지나 성격의 문제지만... 본인이 스스로 게으른 천재라고 믿는 부류의 사람이 늦게 깨지게 되면, 자기가 잘난 맛에 살아오던 시기가 길었던 만큼 깨졌을 때 갑자기 인생의 방향성을 잃고 방황한다. 

 

 내가 자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시작하면 언제나 잘해보였고, 좀만 하다보니 실제로 잘했다. 그러나 뭐가 중요한 지 몰랐다. 공부에 뜻이 있었는 지도 이제 명확하지 않다. 공부는 좀만 해도 잘했으니 남는 시간은 전부 게임만 했고, 게임도 내가 잘하는 지식분야의 것들보다는 못해도 꽤 잘해졌다. 이기는 것이 좋았었고 언제나 그런 요구들이 만족되어서 인생이 외롭지도 않았고 지루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대학교 때 해킹동아리에서 깨졌다. 세계가 너무 크다는 것도 알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굉장히 길어서 다음에 생각을 정리하게 되면 써야겠다. 오만하게 살아왔던 것이 부끄러웠다. 마지막 남은 자기방어기제를 활용해서 잠시 휴학을 하고 회사생활을 하고 왔었다. 

 

 깨지고 나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다른 사람들한테 배려심 없었던 내가 보이고 따듯한 말 한 마디 건넨 적 없었던 내가 보인다. 게으르게 살아왔던 내가 초라해보인다. 그럼에도 내 주변에 남아있어줬던 친구들과 사람들이 너무 고맙게 느껴진다. 나를 좋아해줬던 사람이 있는 것이 놀랍다. 남을 비방하는 데에는 능했지만, 칭찬하는 데에는 인색했고 남들이 뭐 좋아하는 지를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던 불친절한 사람이었다. 바뀌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제 못하는 것을 봐도 화가 나지 않는다. 나도 어디가서는 못할 수 사람이다. 하찮은 상대적 우위로 우월감 갖고 싶지 않다. 사소한 틀린 것을 트집 잡아서 사람을 까내리고 싶지 않다. 어떤 사람은 내가 무뎌졌다고 하지만, 사람한테까지 날카로움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이유도 이제 별로 없어보인다. 많이 힘들었다 24년 정도 유지했던 오만함이었다. 지난 2년간 일이 손에 잡힌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을만큼 힘들었다. 하지만 새로운 목표도 생겼다.

 긍정적인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깨지지 않고 살아간다. 안하무인의 태도로 일관하는 오만한 교수들, 공석에서 남에게 욕을 날릴정도로 무례하지만 그 사람이 가진 훌륭한 능력으로 자리를 유지하는 사람들, 태어날 때부터 돈이 굉장히 많아서 많은 곳에서 높게 설 수 있는 어떤 재벌.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깨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고 그 사람의 에너지가 다른 사람과의 상대적 우월감에서 온다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사람 일반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고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좋고 나쁨의 이야기도 아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스스로 낙차를 견디지 못할 선까지 늙기 전에 깨져서 다행이라는 점이다. 남은 20대는 다른 방향성으로 살아야겠다. 더 중요한 것을 찾고 있다. 사회부적응자처럼 살아도 잘 살아졌던 것이 자랑스럽지 않다.  사람 사이에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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